2021.05.09-05.16 김린성 개인전 『이왁』 KIM Rinseong Photo Exhibition “E-Wak”

김린성 사진에 대한 단상 (feat. 한용운) |  고승욱

#1
그는 할랄 음식점 ‘와르다’의 사장이다. 종일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뒤돌아 서 있는 그는 얼굴보다 등짝이 기억에 남는 사람이다. 그의 가게는 다섯개의 테이블이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데, 고가구를 활용한 인테리어가 보는 이의 시선을 장악 한다. 음식은 그런대로지만 인테리어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는 한때 ‘미스 제주’의 머리도 만졌던 유명 미용사였고, ‘섬돌레기’라는 카페도 운영했었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작업실 한쪽에는 실내장식에 활용하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쓰레기가 아니다. 피사체被寫體다. 사진을 찍느라 2년 간 생계를 접기도 했던 그, 김린성은 사진가다.

#2
나는 화가 지망생이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중에는 사진가들이 많다. 그래서 화가와 사진가를 비교해 본 적이 있다. 화가와 사진가는 어떻게 다른가? 화가는 캔버스-화면을 창조하고 파괴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사진가는 피사체-대상에 발이 묶인 존재다. 화가가 왕이라면 사진가는 머슴이다.

한용운의 시, <복종>은 마치 사진가를 위한 노래인 것 같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하고 싶어요.”
사진가는 자유보다 복종을 선택한 자이다. 화가는 꽃을 꺾어 화병에 담지만, 사진가는 꽃이 있는 높은 절벽을 기어오른다. 꽃은 아름답다. 꽃의 드러남은 스스로 그러하고(自然), 스스로가 이유(自由)인 까닭에 아름다운 것이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사진가가 얻는 달콤과 행복은 꽃을 기다리고 꽃에 복종한 댓가인 것이다.
물론 화가와 사진가의 이런 비교는 과장된 것이다. 화가건 사진가건, 세계의 창조건 세계와 만남이건 작가의 작업 과정은 왕과 머슴, 자유와 복종 사이를 오가는 애증의 반복운동일 것이다. 다만 화가는 자기에서 출발하여 대상에 이르고자 하고, 사진가는 대상에서 출발해서 자기에 이르고자 하는 선후가 다를 뿐이다.

#3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있으면 속살은 햐얗게 남지만, 반소매 아래 팔뚝은 까맣게 탄다. 인화지도 사람 피부와 같다. 다만 인화지는 화학약품으로 처리되었기에 약한 빛에서도 매우 높고 세밀한 반응을 나타낸다. 인화지 위에 필름을 대고 빛을 쪼이면 필름의 음영에 따라 인화지가 타들어 가면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필름 대신 사물을 올려놓아도 인화지의 반응은 동일하다. 빛의 투과 여부와 투과 정도에 따라 이미지가 표현된다. 이렇게 얻은 사진을 포토그램이라 부른다. 용어는 생소하지만, 원리는 햇빛에 그을린 피부처럼 단순하다.

포토그램은 필름이 필요 없기에 카메라도 필요 없다. 원초적인 사진인 것이다. 사진을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김린성의 포토그램은 밥주걱 앞에 손바닥을 모아 오므린 격이다. 그릇도 아닌 이 그릇 속에 김린성이 담아 놓은 것은 무엇일까?

#4
김린성의 작업실에 쌓인 잡동사니들은 모두 폐가에서 주워온 것들이다. 김린성이 폐가를 드나들었던 때는 2010년 전후이다. 2010년은 제주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할 때이다. 따라서 폐가는 사라지고 펜션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폐가에서 김린성은 제주의 어떤 마지막을 필름에 담았다. 마지막 장면 속에는 만감이 춤을 춘다. 부유하는 것들의 쑥덕거림이 어쭙잖고, 정체 모를 것들의 후일담은 방자하다. 할망의 손과 커피믹스 봉지는 대체로 시간의 더께만큼 주름졌고, 먼지 쌓인 이불 속 송장 냄새는 딱딱한 고름을 뚫고 날카롭게 방사한다.

김린성이 찍은 폐가는 올래, 환경, 생태, 평화, 힐링이 좌절되는 곳이다. 진실의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환상의 장막이 불타버린 곳이다. 페티쉬의 무덤인 이 곳에서 김린성은 어떤 진실을 엿보았고 어떤 실재를 탐닉했나?

#5
나는 김린성의 포토그램을 보면서 그가 만들어 낸 이미지를 무어라 부를까 고민했 다. 포즈는 있으나 응시를 잃은 이미지, 흐느적거리지만 촉감이 없는 이미지. 출혈, 골절, 괴사…마치 흡연의 위험성을 알리는 담뱃갑에 등장할만한 이미지들. 길을 헤매던 나의 고민은 엉뚱하게도 ‘정조 없는 이미지’라는 말에서 멈춘다.

다음은 한용운의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일부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변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정조를 ‘지켜야 할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조’ 대신 ‘신념’이나 ‘약속’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정조가 없고, 신념이 없고, 약속이 없는 이미지, 지킬 것이 없는 이미지.

#6
“이미지는 권력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다. 어떤 이미지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될 때 그 이미지는 권력이 된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권력 이전에 욕망이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이미지들은 우리의 크고 작은 욕망에 기대어서 생산된 것들이다. 이미지에 의해 기존의 욕망은 자극되고 없던 욕망은 창조된다. 유행은 이미지를 철갈이 하고 철지난 이미지는 낙엽처럼 나뒹군다. 쓰레기가 된 이미지는 이 집, 저 집에 흘러들어 또 다른 욕망으로 변신한다. 변신을 거듭하던 이미지는 주인이 떠난 폐가에 이르러 욕망의 잔해를 드러낸다. 욕망의 잔해?

‘이미지의 정조’란 무엇인가? 이미지는 우리의 욕망을 위해 생산되었기에 이미지가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욕망이다. 정조 없는 이미지는 한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망라한 우리의 욕망 일체로부터 해방된 이미지, 즉 지킬 것이 없는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폐가와 함께 방치된 것은 욕망의 잔해인가? 잔해의 욕망인가? 폐허가 되었기에 비로소 욕망에서 해방된 이미지, 해방되었기에 비로소 욕망의 주체가 된 이미지, 잔해의 욕망, 잡것들의 욕망.

#7
김린성은 정조 없는 이미지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것 같다. 그보다 먼저 김린성이 느끼는 매혹의 근원은 이 잡것들이 떨치는 해방감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름다움은 아니다. 잡것들의 해방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방은 해방이다. 욕망의 주체가 된 잡것들은 먹잇감을 찾는다. 머슴이 들락거린다. 잡것들은 해방으로 머슴을 홀린다. 머슴은 해방에 도취하여 흔쾌히 잡것들을 위한 욕망의 도구가 되고, 잡것들의 ‘이왁’(이야기)을 전하는 복화술사가 된다. 해방은 욕망을 만나 쾌락이 되고 관능이 된다. 서로에게 도취되어 너 나 없이 뒤엉킨 몸에 불을 사른다. 화염 속에서 원초적인 비명이 터져 나오고 출혈, 골절, 괴사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조형造形으로 빛을 발한다. 잡것들은 분기탱천하고, 노예문서는 불태워지고, 머슴은 왕이 되고, 광란은 절정에 이른다. 김린성의 포토그램은 이미지의 무덤 속에서 거행된 왕의 대관식이다. 하지만 아직 아름다움은 아니다.

#8
여기 김린성의 또 다른 사진이 있다. 사진의 주인인 할망은 이 집의 주인요, 잡것들의 주인이다. 삶의 이력이 일천한 나는 할망의 삶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의미없이 말을 나열해 본다. 막혀버린 불구멍 목구멍에 걸린 가시 돋힌 하소연 구석구석 하영 먹어게 그리운 송장 냄새 시선에 목마른 땟국물 할망 검버섯 하르방 좀 먹은 수의壽衣 너무 오래 살았쪄 토란잎 반짝이는 오줌내 나는 이슬 노래 잘 불럼쪄…

매미는 7년을 번데기로 산다. 하지만 90 평생을 번데기로 살다 가는 사람도 있다. 김린성은 오랜 시간 동안 시골의 할망, 하르방을 만나 먹고, 놀고, ‘이왁’을 들었다. 번데기의 주름 속에 웅크려 있는 조냥과 탕진, 비루와 만용, 참담과 폭소를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했다.

번데기 주름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과는 다를 것이다. 자유와 해방의 아름다움과도 다를 것이다. 그것은 젖먹이 짐승으로 태어난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감정에 휩싸인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헤아릴 수 없다. 헤아릴 수 없기에 김린성의 조방粗放한 포토그램과 굴곡진 기록사진을 연결할 말을 갖고 있지 않다. 조방과 굴곡 사이에 구성진 돌다리라도 한 자락 깔 수 있으면 좋으련만..그곳에서 덜 여 문 것이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9
이 사진에 보이는 벽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검은 흔적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할망의 손때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나는 그것을 ‘작은 시내’라고 말하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인화된 사진이 아니라 네거티브 필름이라 상상해 보자. 때문에 밝은 시내가 반대로 어둡게 보이는 것이라 상상해 보자.

한용운은 노래한다.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 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하지만 ‘작은 시내’를 진실이라고 말하지는 말자. ‘작은 시내’는 다만 돌부리를 울리는 환상이라고 말하자. 삶을 살아가게 하고, 삶에 복종케 하는 페티쉬라고 말하자. ‘작은 시내’를 진실이라고 외치며 감동하는 순간 진실은 추락한다. 차라리 페티쉬 따위에 눈물 흘리는 나의 감정이 싸구려일 뿐이라고 말하자. 세계가 아니라 내가 추락하는 것, 이것이 작가의 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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