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17-10.27 탐라의 美 너울거리는 삶의 희노애락 『기메지전』

탐라의 美 너울거리는 삶의 희노애락 『기메지전』
2006.10.17(화)-10.27(금)

초대 일시
2006.10.17(화) 18:30

주최_(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아트스페이스⋅씨
기획_양미경



기메와 현대예술: 제청에서 전시장으로
| 임정희(연세대 겸임교수, 미학·미술평론)

1. 문화전이를 위한 하나의 시도 : 제청에서 전시장으로 옮겨진 기메

다양한 기메를 ‘신화의 상상’이라는 주제로 보여 준 작년 전시에 이어 올해는 ‘탐라의 미, 너울거리는 삶의 희노애락’이라는 맥락에서 제의적 설치미술로 재구성된 기메가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기메’는 굿하는 제청에 설치되는 다양한 종류의 종이조각이다. 기메가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나 새롭고 이질적인 가치가 증가된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것은 무한한 조작manipulation에 종속되는 대상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기메가 놓일 장소를 생각하고 각각의 기메가 맞이할 가능한 상황이나 전형적인 공간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기메가 놓일 공간의 진부함에 맞추기 위해 기메를 진부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게끔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기메 예술-문화의 내적 차별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는 문화전이의 한 시도로 보인다.
여전히 자율적인 문화라는 수사학적 표현이 존재하지만, 오늘날에는 사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고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다수의 문화적 기원과 결합에 의해 그들 문화를 형성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체성도 단일한 문화보다도 더 많은 문화들에 의해 형성되는 다중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복수적 의존성과 정체성’이나 ‘가로지르는 정체성’이라는 표현도 우리들에게 이미 익숙해지고 있다.
문화전이성의 시대에 ‘기메’의 역사적 기원과 이해에 대한 사실적 규정이 기메 문화에 대한 분리적이고 배타적인 이해에 머물지 않고, 촘촘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목표로 하여 생활형식이 지니고 있는 얽힘과 겹침을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확장적 기회를 만드는 것은 제주에서 의 문화활동을 위한 진보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2. 삶에 대한 신념으로서의 예술

“굿은 내림이다. 한국의 굿. 동북방계 샤머니즘은 내림이지 오름이 아니다. 물론 모심을 통해 올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종이꽃이다. 그 러나 종이꽃, 즉 굿 그림은 내림 내린 사람만이 올린다. 이것은 절 대로 변하지 않는 동북방계 샤머니즘의 진리다.”
– 김지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실천문학사, 2005,401쪽

인간이 신을 부르고(청신請神), 신을 맞이하고(영신迎神), 그리고 신과 함께 노는(오신娛神) 가운데 지극한 기운을 타고 신과 더불어 혼원지기를 이루게 되는 굿은 ‘살림’을 위한 제의이다. 이 굿에서 왜 종이조각, 기메는 필요한 것일까?
예술과 죽음의 관계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통렬하게 자각해 왔고, 대부분의 문명들은 무한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인 존재를 통해 이를 보상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예술이 출현하였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는 ‘제의로서의 예술’이라는 많은 증거들이 그것을 설명해준다.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는 불멸의 영혼에 대한 ‘관념’, 그리고 그 관념의 존속방식인 예술은 인간 사회들이 수천 년 지니고 있었던 육체의 죽음과 함께 실제로는 종결되지 않는 지속적인 삶에 대한 느낌과 예감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하기를 완전히 멈춘다는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에 대한 신념을 소박하게 간직하고 있다.

육체의 죽음과 불멸의 삶을 매개하는 예술 존재의 구조에는 역동적으로 관계하는 두 가지 상보적인 측면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의 측면은 예술의 개별적인 부분이고, 다른 한 측면은 예술의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부분으로서 매개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개별자로서의 예술은 예술가, 예술작품으로서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매개자로서의 예술은 예술가, 예술작품 사이를 연결하고 변화한다. ‘여기’의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변화하는 동안에도 ‘저기’의 예술가와 예술작품들은 살고 있으며, 여기, 저기 사이의 연계는 지속되고 이동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되고 변화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죽는다는 사실 안에서이다.
따라서 개별자의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죽음을 향한 존재’, 즉 한계적인 존재이지만, 사회적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삶을 향한 존재’, 즉 가능적인 존재이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예술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예술은 멈추지 않고 존속되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개별적인 부분과 사회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두 가지 부분들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함께 예술 존재를 만든다.

예술 존재의 지속적이고 이동적인 연결관계인 사회적 부분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문화’라고 부른다. 예술은 문화에 대한 깊이있는 질문과 관계가 있다. 이는 예술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행위를 표현하기 때문만이 아니고, 예술이 문화여건, 또는 문화 환경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며, 예술이 문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들은 한 편으로 생활공간을 꾸미고 행위 가능성들을 결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상상들을 확보하고 기대와 목적에 대한 표상들을 제공하면서 상징적으로 작용한다. 아울러 예술은 스스로 산출할 수 없고, 오히려 오랫동안 지녀 온 문화적 실재성을 지나쳐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따라야 하는 문화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따라서 예술의 ‘사회문화적이고 생태환경적인 측면’은 예술에게는 본래적이다.

3. 인간에게 본래적인 예술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존하지 않고 예술 존재의 사회문화적이고 생태환경적인 측면에 기대어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달하고 삶을 지속한다. 진화과정과 역사에 따라서 문화에의 의존도는 증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여전히 문화를 외적이고, 부가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문화적 현상들 같은 사회들은 단지 삶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외부적으로 결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삶이 교육이나 다른 요소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을 받을 수는 있어도 기본적인 정체성 혹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프랑스 진화론자 르로아-거안Leroi-Gourhan은 이러한 분리적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설득력있게 밝혀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동물적 신체는 환경과 연결되면서 자신의 ‘동물적 신체’를 외재화시켜가는 과정을 통해 ‘기술적이고 상징적인 체계들’로 만들어진 ‘사회적 신체’를 진화시켰고, 이 사회적 신체는 동물적 신체의 유전형질과 달리 사회 안에서 문화적 전달을 통해서만 획득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신체는 인간의 동물적 신체 외부에 있으나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신체(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를 문화환경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동물적인 신체의 차원을 넘어서고, 개별적인 차원을 넘어서 전달되고 발전한다(앙드레 르로아-거안Andre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몸짓과 말), Paris: Albin Michel, 1964).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동물적 신체가 인간 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한계지운다면, 사회적인 신체(문화환경)는 인간이 본래적으로 ‘삶을 향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즉, 인간은 동물적 신체만이 아니라 사회적 신체를 포함하는 한에서만 개별적인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신체는 기술적이고 상징적인 체계들로 만들어지며, 사회문화적이고 생태환경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생산되고 사용되고 전달된다. 기술적인 체계들이 물질적으로 환경을 변화시켜간다면, 상징적인 체계들은 기술적인 체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므로 매개적이고 소통적이고 교류적이다. 또한 기술적 체계에서 도구가 만들어지고 상징적 체계에서 도상들이 만들어지는데, 기술적 체계가 동물적 신체의 기능으로부터 세계 멀리로 퍼져 나가는 외재화의 진행흐름을 지니고 있는 반면, 상징적 체계는 세상 저 끝으로부터 인간 신체 내부로 흘러오는 내재화의 흐름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신체 기능이 외재화되어 만들어진 로봇을 통해 화성을 탐사하고, 시·공간적으로 가장 먼 천체인 퀘이사는 내재화되어 우리에게 표상된다. 르로아-거안은 이를 가르켜 ‘기술들은 우리의 신체를 우주화시키고, 상징들은 우리의 세계를 신체화시킨다’고 하였다. 외재화하는 기술적 체계와 내재화하는 상징적 체계는 상보적 관계를 이루면서, 환경 속 사물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아 있고, 우리 안의 능력으로서 환경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건 인간이건 개별적이거나 사회적인 어느 한 측면만으로 본래적일 수 없다. 설령 독립적이라고 여길 수는 있더라도, 이것은 인간이나 예술을 저 바깥 환경 속에서나 있는 단순 대상으로 의식 속에 잠가버린 하나의 문화적 태도일 뿐이다. 우리 시대 예술이나 인간은 인간이나 예술로 존재하려 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사회문화적이고 환경적이며 매개적이고 소통적인 차원과 중층 결합되어 있다. 사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며 상호 조건짓고 있다. 그러니까 삶의 그물망에 놓여 있는 각각의 사유, 언어, 행동을, 또한 모든 존재를 조건짓고 있는 것이다.

4. 현대예술의 전문주의 구조의 변화: 분리된 자아에서 확장된 자아로

20세기 서양의 현대예술의 전문주의 구조는 ‘자아’와 ‘제작’간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예술이 개별 예술가의 내면성의 표현으로 이해된다면, 예술가 개인의 심리는 예술작품에 본질적일 것이다. 서양의 현대 예술-문화체계에서 예술가의 자아는 절대적인 자기 창조에 대한 우화를 통해 다양하게 도상화되고 확대되고 훼손되고 소아화되었다.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독창성’은 지속적으로 논의된 유일한 주제였는데, 여기에서 독창성은 작품형식의 창의성보다도 작품의 원천적인 태생, 작품의 기원으로서의 자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원으로서의 자아는 새롭게 경험된 현재와 전통이 얹혀진 과거 사이에 절대적인 구획을 짓는 방법이었고, 대화를 철저히 차단한 침묵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반복만을 허용하는 불변과 영속의 고정된 장소, 존재였다. 언어와 자연을 추방시킨 채 ‘분리된 자아’(미적 순수성과 자유라는 진공공간에 머무는)를 특권화해 온 전문적 예술-문화환경에서는 자아와 동일시되어 온 단일성·진품성·유일성·독창성·원작이라는 용어들과 함께 이 용어들과 대칭적 관계를 이루는 복수성·복제성·다양성·위작·모작 등의 용어가 새로이 고찰되었다.
그러나 미니멀아트, 개념예술처럼 분리적 자아, 고정된 자아를 부정적·차별적으로 정의할 수는 있었으나, 자아를 유지하는 틀 자체를 걷어내는 무자아성(無自我性selflessness)을 이해하기는 여전히 한계적이었다. 무자아성을 거치면서야 ‘예술의 죽음’을 선언했던 자아는 비로서 모든 방향으로, 우주 전 영역에서 ‘확장된 자아’로 존재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활발해진 대지예술, 생태예술, 새장르 공공예술, 여성주의예술 등은 분리된 자아라는 예술가의 개념이 토대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들에게서 보이는 공동작업collaboration은 정치적 맥락에서 수입되었는데, 예술가는 여기서 영감을 끌어낸 셈이다. 이러한 예술이 기초하고 있는 ‘확장된 자아’의 개념(공동체적 연대와 책임의 실천)은 진화된 예술-문화체계의 일부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자아를 작업장 바깥에, 사회 및 공동체, 나아가 지구생태계 전체 관계의 틀거리 안쪽에 위치시키면서 자아/타자, 이곳/저곳, 현재/과거의 가능한 결합을 주관적 인류학자로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연과 인간 및 자연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지니고 자연에 대한 새로운 담론들을 창출하면서 인간중심적이고, 이원론적이며, 위계적인 근대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외적 자연과 사회적인 타자, 그리고 인간 자신의 억압된 자연에 대한 회복과 복원 노력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작업들은 ‘사회적 건강’ ‘문화적 다양성’ ‘지구환경적 각성’과 관련된 이슈들을 다루며, 권력과 자본의 획일적이고 위계적인 구조에 저항하는 일에도 가치를 두고 있다. 또한 작업의 과정을 중시하며, 그 작업의 형태가 종종 일시적인 모습을 띠고, 전세계적인 것보다는 지역적인 이야기에 충실하면서 정치적 주장을 포함하기도 한다. 특히 작업의 결과보다 작업에 걸쳐있는 전 ‘과정’을 특권화하는 것이 특징으로 두드러진다. 새로운 상황에 마주치고 작거나 하찮은 소소한 일에 우연히 마주치면서, 예술가는 그들이 이해하지 않은 영역에 자신이 들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과정’을 예술매체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참여예술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일상적 경험과 경험방식을 탐구할 때 유용한 수단을 그들에게 제공해준다. ‘과정’은 행동주의적 예술가에게 그들이 작업하고 있는 것에 관련해 비전통적 측면을 형성시키는 길을 터주면서 시간 및 관계를 특권화한다. 이런 작품의 예술매체는 재료의 변화과정을 끈기있게 보여주거나, 제작과정에서의 예술가의 행위흔적을 남기는 데에서, 예술적 관찰을 중시하는 데에서, 그 자체로는, 저절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탐색 중에 있는 관계적・사회적 혹은 정치적 과정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곤 한다.
확장된 자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이들의 작업은 종래 매체의 순수성과 분리를 요구해온 전문적인 예술-문화체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일련의 문화적 문맥 위에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단절된 자아로부터 확장된 자아로의 변화를 초래한 서양 현대 예술-문화체계의 근본적인 원인을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이 구성되고 있는 문화적 결정항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생에 근거한 단칭의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나서, 일 국가보다도 인간성을 토대로 한 전지구적 정체성으로 변화하는 것은 손쉬운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대화에서 시작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의 신화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지위를 점하고 있는 시각예술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전지구적 차원의 공동체적 삶에 자신을 세심하게 자리매김했을지라도 위축을 느끼기 마련이다.

5. ‘숭고’의 부상

예술이 ‘예술의 생산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던 20세기 초부터 최근에는 예술이 시원적인 환상을 창조하려는 경향 일반을 가르키는 넓은 의미로 확대됨에 따라 예술과 철학, 종교, 과학, 도덕 간의 분명한 경계는 사라지고 혼종과 섞임을 공유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협의의 예술과 광의의 문화 간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즉 예술은 이제 특정 영역만이 아니라 ‘삶 전체’의 다양한 장소로 장을 확대하였고, 제작될 때 촉발된 예술가의, 협력자의, 공동체 구성원의 경험들은 개입과 참여가 개방되었다. 훌륭한 예술 대 유익한 문화개발. 오직 이원분리적인 서양정신에서만 그런 질문이 제기되겠으나,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그런 토론은 윤리적 가치에 기초하지 않은 비판적 담론 내에서나 허용될 뿐이다. 예술이 문화 일반으로 넓어지면서, 예술과 일상생활과의 통합가능성이 탐구되면서, 그리고 삶 자체의 무한함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이 자연과 현실 앞에서 느껴지는 공포를 감추기 위해 씌웠던 가림막은 벗겨지기 시작했다. 미적 현실이 ‘해방의 원체험장’으로 이해되면서 미적 완성에 가려져왔던 ‘숭고’의 체험이 다시금 이야기되기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미의 영역은 ‘예술미’에, 숭고는 ‘자연미’ 또는 복잡성에 관계하였고, 오랫동안 예술의 역사에서 숭고에 대한 열망은 미의 완성에 종속되어왔다. 그러나 자연환경 위기를 계기로 자연과 예술에 대한 관계 및 상호연관성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그리고 활발하게 논의되고,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작업으로 다루어지면서, 예술의 영역에서 비껴서 있었던 ‘숭고’는 중요한 예술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술 생산과 수용의 분리가 무의미해지고 있는 요즈음, 수용의 측면에서 접근이 더욱 수월한 ‘숭고’는 활발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자연(自然)을 천지(天地:우주)와 천하(天下:인간의 자연과 사회)로 분리하지 않았던 동양에서는 상(象:신비적 표상/표현매체)이라는 일종의 이미지가 천지와 천하를 연속적으로 이어주었다. 象은 天下에 한정되는 형(形)과는 구별되어, 天地의 의(意:뜻)와 天下의 형(形)을 매개하였다. 이러한 象의 인식과 표현을 목표로 하는 예술은 추상적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 意(뜻)를 形(형태)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인간은 象을 통하여 천지와 단절없는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象이 바로 예술이다. 象은 신비적 표상이기도 하고, 표현의 매체이기도 한데 노자와 장자의 입장에서는 道의 객관적 현상(現象)을 일컫기도 하고, 동시에 道 자체의 모습인 상외지상(象外之象:현상 밖의 상), 또는 무상지상(無象之象: 현상되지 않는 것의 상)을 일컬었다. 동양에서는 미와 숭고의 개념이 첨예하게 분리되어 독립 범주를 이루면서 각축을 벌이지 않고 동시적으로 수용되어 온 셈이다.

숭고와 관련된 감성적 지각의 범위는 지구생태계 전체에 걸쳐 있다. 들판 야생화의 아름다움과 사막의 광활함, 전원의 평화로움, 석양에 물든 저녁 하늘의 막막함, 또는 기암절벽과 울창한 열대림의 웅장함에 매료되거나,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진귀함을 느끼거나 인간세계를 반추하게 하는 어떤 것을 느낄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관계가 인간을 가두어 본래의 부드러운 성정을 키워가는 대신 파괴시켜가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 싹틀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살아갈 대안을 마련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신체를 단련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신비를 통해서 일수도 있다.
이 때 일어나는 감정을 우리는 ‘숭고’라고 부르는데, 숭고의 감정에는 고통과 기쁨이 함께 수반된다. 장-프랑수아 료타르Jean-François Lyotqrd의 지적처럼 숭고는 ‘개념에 일치하는 대상을 상상력이 표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즉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데아를 가질 수는 있으나 그것의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을 지각가능한 대상으로 예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한히 큰 것, 무한히 강한 것을 생각할 수는 있으되 이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으로 표상할 수는 없다. 이 표상불가능성이 감성적 지각을 넘어 인간의 한계 능력에 대한 겸손과 공동의 세계에 대한 절제의 윤리를 일깨우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숭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호기심에 대한 보안으로서 과도하게 만연해있는 심미적 과잉자극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숭고의 감정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과 표준화된 것을 초월하는 지각력, 전통적이고 단일문화적인 이해를 넘어 새로운 문화 전이적인 이해를 수용할 수 있는 혼합능력, 자신의 문화와 낯선 문화 사이에 있는 대립을 넘어서는 문화적 능력 등이 복합적으로 연관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기메의 광범위한 해석을 위하여

기메는 숭고의 설치미술이다. 기메의 종이조각들은 눈에 보이는 표상방식을 통해 표상불가능한 것을 암시한다. 기메의 다양한 형상들은 신의 존재를 우리가 믿도록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확장된 자아를 부추켜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의 분리가 사라진 아득한 공간과 시간을 찾아 나서게 하는 통로이다. 기메는 예술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홀로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 이중적 동시성이 기메의 해석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메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에 대해 말하지만, 그러한 말하기는 존재하는 의사소통 방식의 한가운데서 특별한 개입을 하는 상징체계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기메는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서 말하기가 가능해진다.

예술로서의 기메와 마찬가지로 문화로서의 기메가 전통적 개념이 가정하듯이(민속문화) 섬처럼 고립적이고 닫힌 원처럼 폐쇄적으로 개별 문화로서 이해된다면, 우리는 개별 문화간의 상호공존과 상호협력을 탐색할 수 없다. 오래전부터 문화는 전통적인 경계를 빠져 나가 동질성이나 고립, 격리 대신에 전이라는 새로운 형식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혼합과 침투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 관계들과 수용적이고 생산적으로 상호작용하기 위한 기메의 해석학적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